개봉 전에는 그냥 한국형 미스터리 범죄물이겠거니 했는데, 영화가 시작되고 5분도 안 돼서 느낌이 달랐습니다. 주인공이 남의 집 열쇠를 복사해 들어가는 장면을 보는데, 불쾌함과 동시에 눈을 뗄 수 없는 이상한 끌림이 생겼습니다. 그 감각이 영화 내내 이어졌습니다.

불편한 주인공과 피카레스크 구조가 만들어낸 몰입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이 영화는 관음증을 소재로 쓴 게 아니라, 관음증을 장치로 삼아 현대 사회 자체를 찍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인공 구정태는 전형적인 피카레스크(picaresque) 캐릭터입니다. 피카레스크란 도덕적으로 결함 있는 인물이 사건을 끌어가는 서사 구조를 말하는데, 쉽게 말해 완전히 나쁜 사람도, 완전히 좋은 사람도 아닌 주인공이 이야기를 주도하는 방식입니다. 구정태가 딱 그렇습니다.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는 건 분명한 범죄지만, 고장난 전등을 갈아주고 배관을 수리하는 기묘한 선행도 함께 합니다. 그래서 관객은 이 인물을 단순하게 처리하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스릴러 영화는 선악 구도가 뚜렷해야 몰입이 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 영화는 그 공식을 완전히 뒤집으면서 오히려 더 깊이 끌어당겼습니다. 주인공이 불편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시점에서 사건을 따라가게 된다는 점이 이 영화의 핵심 전략입니다.
영화가 활용한 서사 기법 중 하나가 보이스오버 내레이션(voice-over narration)입니다.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란 화면 밖에서 인물이 직접 자신의 생각이나 상황을 설명하는 기법으로, 관객을 인물의 내면으로 강제로 끌어들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구정태의 목소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데, 덕분에 관객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이 곧 이 영화의 질감입니다.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이 내레이션 방식에 대한 호불호가 갈렸는데, 이동진 평론가는 이 부분이 몰입과 주제의식을 약화시킨다고 지적했습니다(출처: 씨네21). 저는 이 의견에 반은 동의하고, 반은 다르게 봅니다. 후반부에서 내레이션이 사건 설명 도구로 기능하기 시작할 때는 확실히 힘이 빠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반부에서는 오히려 이 기법이 관객의 공모감을 만들어내는 데 효과적으로 작동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만들어낸 불편한 몰입의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구정태의 행동이 SNS로 타인의 삶을 소비하는 현대인의 습관과 미묘하게 겹쳐 보인다는 점
- 피카레스크 구조 덕분에 관객이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고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는 점
-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시청자를 구정태의 공범처럼 느끼게 만든다는 점
SNS 허상과 반전 구조, 그리고 영화가 남긴 질문
이 영화에서 한소라라는 인물은 사실상 현재 SNS 인플루언서 문화 전체에 대한 알레고리(allegory)입니다. 알레고리란 표면적인 이야기 뒤에 다른 층위의 의미를 숨겨두는 서사 기법인데, 쉽게 말해 한소라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지는 삶과 진짜 삶 사이의 간극 전체를 비추는 방식입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신혜선의 연기는 그 자체로 놀라웠습니다.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준 단아하고 여린 이미지와 완전히 다른, 계산적이고 공감 능력이 결여된 인물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습니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서 자신의 허벅지를 직접 칼로 긋는 장면과 마지막에 구정태의 눈을 찌르며 터뜨리는 절규는 소름이 돋는 수준이었습니다. 2024년 부일영화상에서 신혜선이 여자 올해의 스타상을 수상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출처: 부일영화상 공식).
영화의 반전 구조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내러티브 트위스트(narrative twist), 즉 이야기의 전제 자체를 뒤집는 반전을 중반부에 배치합니다. 한소라가 실제로 죽은 게 아니라 자작극을 벌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관객은 앞서 본 모든 장면을 다시 읽게 됩니다. 이 기법은 잘 쓰면 영화를 두 배로 즐기게 만들지만, 그 이후의 전개가 반전의 충격을 유지하지 못하면 오히려 에너지가 분산됩니다.
제 경험상 이 부분이 이 영화의 구조적 한계입니다. 반전 이후 영화는 빠르게 장르적 스릴러 문법으로 전환되는데, 초반부에 쌓아둔 "관찰 사회"에 대한 질문들이 사건 해결 구조 안에 묻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후반부가 비교적 예측 가능한 흐름으로 정리된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오히려 끝까지 결론을 유보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더 강렬한 여운을 남겼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꽤 묵직하게 남았습니다. 출소한 구정태의 일상이 다시 인스타그램 프레임 안에서 보이고, 거기에 무감각하게 하트가 눌리는 컷으로 끝납니다. 결국 이 영화는 악인이 잡혔다고 해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줍니다. 플랫폼이라는 무대와 그 위에 올라가려는 욕망은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개봉 22일 차에 누적 관객 100만을 돌파했고, 신생 중소 배급사 작품임에도 손익분기점인 110만~120만 관객을 넘겼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가진 입소문 경쟁력을 보여줍니다. 대형 프랜차이즈 없이도 관객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례로 평가됩니다.
그녀가 죽었다는 보고 나서 바로 잊히는 영화가 아닙니다. 저도 영화관을 나오면서 스마트폰을 열었다가 잠깐 멈췄습니다. 타인의 피드를 훑는 그 행동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스릴러로서의 완성도를 따지기 전에,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런 순간이 한 번이라도 찾아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https://namu.wiki/w/%EA%B7%B8%EB%85%80%EA%B0%80%20%EC%A3%BD%EC%97%88%EB%8B%A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