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에 꽤 기대했습니다. 물에 잠긴 서울, 김다미와 박해수라는 조합, 넷플릭스 오리지널 재난 블록버스터. 조건만 보면 나쁠 이유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다 보고 나니 "이게 내가 본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예상과 전혀 다른 영화였습니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요.

재난 영화인 줄 알고 틀었다가 SF를 본 기분
처음 30~40분은 분명히 재난 영화입니다. 아파트 저층까지 물이 차오르고, 비상구는 막히고, 사람들이 각자 살겠다고 흩어지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초반부의 압박감이 꽤 진짜 같다는 점이었습니다. 2012나 해운대처럼 스케일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침수된 공간 안에 사람들을 가두고 천천히 조이는 방식이라 오히려 더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중반을 넘어서면서 영화가 갑자기 다른 장르로 넘어갑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입니다. 강화학습이란 AI가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스스로 최적의 행동을 학습하는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 게임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계속 플레이를 반복하며 패턴을 익히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영화는 이 구조를 루프 서사로 시각화해서 AI가 모성애를 학습하는 과정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루프물은 반복 속에서 캐릭터가 성장하거나 진실을 발견하는 구조로 재미를 줍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의 루프는 그 재미보다는 딥러닝(Deep Learning) 과정의 시각화에 더 가깝습니다. 딥러닝이란 인간의 신경망 구조를 모방한 다층 알고리즘으로, 대량의 데이터를 반복 학습하여 패턴을 인식하는 기술입니다. 영화는 이 과정을 안나와 자인 사이의 반복되는 재난 상황으로 표현했는데, 솔직히 처음엔 이게 루프인지 플래시백인지 구분이 잘 안 됐습니다.
이 장르 전환이 의도 자체는 이해가 되지만, 실제 영화 경험으로는 재난물을 기대한 관객 입장에서 상당히 당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초반과 후반이 마치 다른 영화 두 편을 이어 붙인 것 같은 인상을 줬습니다.
강화학습 설정이 설득력을 잃는 지점
저는 AI나 머신러닝 전공자는 아니지만, 영화가 강화학습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뭔가 어색함이 계속 느껴졌습니다. 나중에 관련 반응들을 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정리할 수 있었는데, 핵심은 이겁니다. 영화가 "모성애를 학습한다"고 설명하지만, 실제 화면에서 보여주는 건 전투력이 올라가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향상되는 모습이 대부분이라는 점입니다.
강화학습에는 보상 해킹(Reward Hacking)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보상 해킹이란 AI가 설계자의 의도와 달리, 보상 조건만 충족시키는 엉뚱한 방식으로 학습을 완료해버리는 현상입니다. 영화 속 이모션 엔진이 모성애를 학습한다면서 실제로는 생존 능력만 키우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보상 해킹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NVIDIA의 딥러닝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Devansh Bisla가 "강화학습을 통한 대규모 학습 과정을 잘 시각화했다"고 평가한 것은 사실이지만(출처: X(트위터)), 저는 그 시각화가 영화적 몰입으로 연결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기술적으로 흥미로운 묘사와, 극 중에서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반드시 같은 건 아니니까요.
영화의 설정 오류 지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지구 전체를 침수시킬 물의 양은 현실적으로 소행성 충돌과 빙하 소실만으로는 설명이 불충분
- 강화학습 목표로 설정된 '모성애'와 실제 묘사되는 학습 내용 사이의 괴리
- 신인류 두 명(모자 관계)만으로는 유전적 다양성 확보가 불가능한 생물학적 문제
- 아역 캐릭터 자인의 행동이 극 내 재난 상황과 인물 심리적 맥락과 어울리지 않는 부분
이런 부분들이 겹치면서, 후반부로 갈수록 설정을 납득하려고 애쓰다가 이야기 자체를 즐기기 어려운 순간들이 생겼습니다.
왓챠 1점대와 넷플릭스 글로벌 1위, 이 두 숫자가 동시에 나온 이유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본 지점이 사실 이겁니다. 왓챠 평점 1.9점, 키노라이츠 35%라는 처참한 국내 평가가 나오는 동시에, 넷플릭스 글로벌 TOP10 비영어 영화 1위를 2주 연속 기록했습니다. 누적 시청 시간은 1억 5700만 시간을 넘었고, 역대 넷플릭스 비영어 영화 부문 5위까지 올랐습니다(출처: Netflix Top 10).
일반적으로 평점이 낮으면 흥행도 부진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영화는 그 공식을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건 두 가지 이유가 겹쳤을 때입니다. 하나는 마케팅 포지셔닝이 강렬하게 먹혔을 때, 다른 하나는 욕이라도 하고 싶게 만드는 자극이 있을 때입니다.
재난 영화로 포장해서 기대감을 끌어올린 뒤, 중반부터 완전히 다른 장르로 전환하는 구조는 관객에게 배신감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게 대체 뭐야"라며 끝까지 보게 만드는 효과도 있습니다. 1점대 평점과 1억 뷰가 공존하는 이 기묘한 조합은, 어떤 의미에서는 OTT 콘텐츠 소비 방식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인 것 같습니다. 극장에서 티켓값을 내고 봤다면 훨씬 더 강한 반감이 나왔을 겁니다.
시청자 반응의 양극화를 보면 다음과 같은 패턴이 확인됩니다.
- 재난 스펙터클과 시각효과(VFX) 구현 수준에는 대체로 긍정적
- 장르 전환 시점과 방식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
- 아역 캐릭터 묘사 문제가 몰입을 방해한다는 지적 반복
- AI·딥러닝 관련 설정이 흥미롭다는 소수 의견 존재
이 영화에 대해 "평은 관객의 권리이지만 저주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었고, 일부 평론가들은 필요 이상으로 매도당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의견에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단, 그게 영화의 완성도 문제를 덮어주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시도는 야심찼고, 실패는 분명했습니다.
대홍수는 분명히 무언가를 말하려 한 영화입니다. 감정이란 무엇인가, AI는 인간의 감정을 학습할 수 있는가, 인류의 다음 진화는 어떤 형태일까. 이 질문들은 충분히 값진 출발점입니다. 문제는 그 질문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장르적 약속을 깼고, 개연성의 빈틈을 너무 많이 남겼다는 점입니다. 김병우 감독의 야심이 담긴 작품임은 틀림없지만, 야심이 곧 완성도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영화였습니다. 그래도 한 번쯤 직접 보고 판단해볼 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B%8C%80%ED%99%8D%EC%88%98(%EC%98%81%ED%99%94)
https://www.netflix.com/tudum/top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