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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버드 (엄마와 딸, 청춘의 불안, 자아 찾기)

by moneybugi 2026. 6. 2.

로튼 토마토 신선도 99%, 메타크리틱 93점. 이 두 수치만 봐도 《레이디 버드》가 얼마나 평단의 극찬을 받았는지 짐작이 됩니다. 처음 이 수치를 접했을 때 솔직히 의심부터 했습니다. "93분짜리 고등학생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나?" 직접 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납득했습니다.

엄마와 딸, 사랑이 상처처럼 느껴지는 순간

《레이디 버드》는 그레타 거윅 감독의 첫 단독 장편 연출작입니다. 2017년 11월 A24 배급으로 미국에서 제한 개봉했고, 국내에는 2018년 4월 UPI 코리아를 통해 들어왔습니다. 제작비 1,000만 달러로 만들어 최종 약 7,7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뒀으니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셈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제가 가장 먼저 빠져들었던 건 레이디 버드와 엄마 마리온의 관계였습니다. 둘은 첫 장면부터 차 안에서 티격태격합니다. 그런데 싸우는 방식이 묘하게 낯익었습니다. 상대를 진짜 미워해서 싸우는 게 아니라, 너무 가까워서 생기는 마찰처럼 보였거든요.

여기서 영화가 사용하는 서사 기법이 흥미롭습니다. 이 영화는 컨플릭트 드라이빙 내러티브(conflict-driven narrative), 즉 인물 간 갈등이 이야기를 밀고 나가는 구조를 채택합니다. 컨플릭트 드라이빙 내러티브란 외부 사건이 아닌 인물들 사이의 감정적 충돌이 플롯을 전진시키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방식을 아주 정밀하게 구사합니다.

마리온은 딸을 걱정하고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늘 현실적인 언어로 나옵니다. "우리 형편을 알잖아"라는 말은 분명 딸을 향한 걱정이지만, 레이디 버드에게는 "너의 꿈은 현실적이지 않아"로 들립니다. 제가 직접 봐보니, 이 엇갈림이 영화 전체에 걸쳐 쌓이고 쌓이면서 마지막 공항 장면에서 한 번에 터집니다. 마리온이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결국 뛰어 들어가지만 딸은 이미 보안 검색대를 통과한 장면. 그 30초가 이 영화 전체를 압축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청춘의 불안, 과장하지 않아서 더 아팠습니다

《레이디 버드》가 다른 하이틴 영화와 구분되는 지점은 바로 청춘을 낭만화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주인공 크리스틴은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고 불러달라고 고집하는데, 이 설정 하나가 캐릭터 전체를 설명합니다. 지금의 자신이 아닌 다른 자신이 되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그게 아직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는 불안함이 이름 하나에 담겨 있습니다.

영화 심리학에서는 이런 캐릭터를 정체성 탐색기(identity moratorium) 상태에 있다고 표현합니다. 정체성 탐색기란 심리학자 제임스 마르샤(James Marcia)의 정체성 발달 이론에서 나온 개념으로, 다양한 역할과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지만 아직 어느 것도 확정 짓지 못한 상태를 가리킵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레이디 버드가 친구를 바꾸고, 남자친구를 바꾸고, 자신이 사는 동네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행동이 모두 이 상태와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솔직히 예상 밖이었던 건, 레이디 버드의 행동이 꽤 이기적으로 보이는 순간이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친구 줄리를 제나 그룹에 끼기 위해 슬쩍 밀어두고, 자신이 살던 동네를 부끄러워하면서 거짓말까지 합니다. 처음엔 "이 캐릭터 왜 이러나" 싶었는데, 돌아보면 그게 가장 현실적인 청춘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착하고 올바른 청춘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실제로 누구나 저질렀을 법한 미숙함을 그대로 담은 영화라는 점에서 오히려 더 공감이 됐습니다.

영화가 다루는 청춘의 핵심 감정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지금 있는 곳을 벗어나야 진짜 삶이 시작될 것 같다는 조바심
  • 친구 관계에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그로 인한 배신
  • 첫사랑과 상처, 그리고 그것이 의외로 빨리 지나간다는 것
  • 자신을 낳아준 공간과 사람들에게 느끼는 복잡한 감정

자아 찾기, 떠난 다음에야 보이는 것들

영화의 마지막 20분이 제게는 가장 오래 남았습니다. 뉴욕에 도착한 크리스틴은 스스로 본명을 다시 쓰기 시작합니다.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진 것입니다. 이 장면 하나가 영화 전체의 성장 서사(bildungsroman)를 마무리합니다. 빌둥스로만(bildungsroman)이란 독일어에서 온 개념으로, 주인공이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의 심리적·도덕적 성장을 따라가는 문학 및 영화 장르를 말합니다. 《레이디 버드》는 현대 영화에서 이 장르를 가장 섬세하게 구현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그레타 거윅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자전적인 작품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본인의 고향인 새크라멘토, 가톨릭 고등학교 경험, 간호사 어머니 같은 설정은 가져왔지만 나머지는 허구라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자전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감독이 특정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편적인 감정의 질감을 포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일 겁니다.

영화 연구자들 사이에서 《레이디 버드》는 여성 청춘 서사(female coming-of-age)의 새로운 기준점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여성 청춘 서사란 기존 성장 영화에서 주로 남성 중심으로 그려졌던 자아 탐색의 여정을 여성의 시선과 경험으로 재구성한 장르를 말합니다. 그레타 거윅 감독 스스로도 《보이후드》와 《400번의 구타》 같은 성장 영화의 여성판을 만들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미국영화연구소(AFI)는 이 영화를 2017년 10대 영화 중 하나로 선정했습니다(출처: American Film Institute).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마리온이 딸에게 전달하지 못한 채 버린 편지들을 아빠 래리가 몰래 짐에 넣어두는 장면입니다. 편지에는 "넌 기적이야, 화내서 미안해"라고 써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온이 그 편지를 전달하지 못한 이유가 "딸이 철자나 문법을 지적할까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데 표현이 안 되는 이유가 이렇게 구체적이고 소소할 수 있다는 게, 보는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결국 《레이디 버드》는 '성장'이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그것이 어떤 극적인 깨달음의 순간이 아니라, 떠나고 나서야 남겨진 것들의 가치를 알게 되는 과정이라는 걸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시얼샤 로넌의 연기가 그 감정의 밀도를 끝까지 지탱해줍니다. 하이틴 장르가 낯설거나 잔잔한 서사가 불편한 분께는 솔직히 취향을 타는 영화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가족과의 관계, 혹은 고향을 떠났던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영화가 끝난 뒤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랬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B%A0%88%EC%9D%B4%EB%94%94%20%EB%B2%84%EB%93%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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