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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해고 공포, 블랙코미디, 사회풍자)

by moneybugi 2026. 5. 27.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밉지 않을 수 있을까요.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는 바로 그 불편한 감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동안 멍했는데, 이병헌이 연기한 만수가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절박함이 이해돼버리는 그 이상한 감각 때문이었습니다.

해고 한 방이 무너뜨린 25년

영화의 시작은 아주 평범합니다. 만수는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이고, 가족도 있고, 집도 있습니다. 스스로 "다 이루었다"고 느끼며 사는 사람이죠. 그런데 회사는 그 25년을 한 문장으로 잘라냅니다. "미안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연출이 전혀 과장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눈물도 없고, 극적인 음악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잘립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졌습니다. 현실에서 해고 통보가 딱 그렇거든요.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하나 등장합니다. 바로 피카레스크(Picaresque) 구조입니다. 피카레스크란 도덕적으로 흠결 있는 주인공이 사회 하층에서 출발해 생존을 위해 반사회적 행동을 반복하며 상승하는 서사 형식을 말합니다. 《어쩔수가없다》는 이 피카레스크 구조를 한국 중산층 붕괴 서사에 정확히 접붙입니다. 만수는 악당이 아니라, 시스템에 밀려난 평범한 사람이 살아남으려는 과정에서 조금씩 괴물이 되어가는 인물입니다.

실제로 국내 고용 시장 데이터를 보면 이 설정이 단순한 허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40대 이상 중장년층의 재취업 기간은 평균 11.4개월에 달하며, 재취업 성공률도 젊은 층에 비해 현저히 낮습니다(출처: 한국고용정보원). 만수의 1년 넘는 재취업 실패가 결코 과장된 설정이 아닌 것입니다.

블랙코미디가 잔인한 이유

이 영화를 블랙코미디라고 분류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웃긴 장면들이 분명히 있거든요. 특히 만수가 경쟁자 구범모를 살해하려다 엉뚱하게도 세 사람이 각자 다른 얘기를 하며 엇갈리는 장면은, 선곡된 음악과 자막까지 맞물리면서 정말 잘 만든 코미디 시퀀스입니다. 제가 직접 봤는데, 웃다가 바로 "아, 이 상황이 웃기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블랙코미디(Black Comedy)란 죽음, 범죄, 사회 불평등 같은 어둡고 불편한 소재를 희극적 방식으로 다루는 장르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웃음이 도덕적 불편함과 동시에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그 웃음이 편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 비판이 더 날카롭게 박힙니다.

《어쩔수가없다》가 블랙코미디로서 효과적인 이유는 바로 이 지점입니다. 만수가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발상 자체가 황당하고 우스운데, 그 황당함이 한국 취업 시장의 잔혹한 현실과 너무 잘 맞아떨어집니다. "경쟁자가 사라지면 내 자리가 생긴다"는 만수의 논리는 과장이지만, 동시에 경쟁을 당연시하는 사회 구조의 극단적 표현이기도 하니까요.

다만 저는 이 부분에서 영화에 한 가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블랙코미디의 날이 점점 장르적 쾌감 쪽으로 기울어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초반의 현실 밀착감이 중후반에는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장센 중심 연출로 무게추가 이동합니다. 그 연출이 뛰어나다는 건 인정하지만, 저는 초반의 그 답답하고 불안한 현실감이 끝까지 유지됐으면 더 강렬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풍자로서의 날카로움과 한계

《어쩔수가없다》의 원작은 미국 소설가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The Ax》입니다. 이 소설 자체가 1990년대 미국 기업 구조조정 열풍을 배경으로 한 풍자물이었는데, 박찬욱 감독은 이를 2020년대 한국 사회로 이식했습니다.

이 이식이 흥미로운 이유는 배경만 바꾼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영화는 AI와 자동화로 인한 무인화, 중국 자본 진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라는 현재 한국 노동 시장의 구체적인 맥락을 꽤 정확히 짚고 있습니다. 만수가 다니던 태양제지가 미국계 자본에 인수된 뒤 구조조정되고, 재취업 면접에서 중국인 면접관에게 거절당하는 장면은 그냥 배경 묘사가 아닙니다.

영화가 던지는 사회풍자의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숙련 노동자도 시스템이 원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소모품이 된다
  • 재취업 과정에서 나이, 경력, 자존심은 짐이 된다
  • 경쟁을 당연시하는 구조가 개인을 어떻게 타락시키는지 보여준다
  • AI와 자동화가 일상화된 세계에서 인간 노동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해외에서 이 영화가 특히 호평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로튼토마토 평론가 점수 97%를 기록했는데, 영미권에서는 AI 대량 실업이 이미 현실화되고 있어 이 영화의 주제가 문화적으로 즉각 와닿는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미국 내 자동화로 인한 일자리 대체 위험군은 전체 노동자의 약 47%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습니다(출처: IMDb).

이병헌이라는 연기가 만드는 설득력

영화의 모든 무게를 결국 이병헌 한 명이 지탱합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그가 만수를 결코 악인처럼 보이게 연기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그냥 무너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소격 효과(Verfremdungseffekt)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소격 효과란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가 제안한 개념으로, 관객이 등장인물에게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이입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게 만드는 연출 방식을 말합니다. 《어쩔수가없다》는 이 소격 효과를 반은 쓰고, 반은 일부러 쓰지 않습니다. 만수의 행동이 비상식적으로 보일 때는 거리를 두게 하고, 그의 감정이 절박하게 보일 때는 이입하게 만듭니다. 그 불균형이 이 영화의 불편함을 만들어냅니다.

로튼토마토의 평론가 총평도 이 지점을 짚습니다. "이병헌의 능숙한 불운 연기를 통해 완벽하게 구현된 기업 내 치열한 경쟁을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이라고 표현하는데, 저도 이 평가에 공감합니다. 만수가 술을 앞에 두고 "어쩔수가없다"라고 중얼거리며 자기 합리화를 하는 장면은, 이 영화 전체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예진이 연기한 미리 역시 단순한 조력자가 아닙니다. 다재다능하고 입체적인 인물로, 남편의 범죄를 알게 된 뒤에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공모를 선택합니다. 박찬욱 감독이 "이병헌보다 훨씬 어려운 인물을 연기했다"고 직접 언급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리의 선택이야말로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을 가장 정직하게 체현하고 있으니까요.

《어쩔수가없다》는 단순히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경쟁 사회가 평범한 인간을 어떻게 소모시키는지를 매우 차갑게, 그리고 동시에 영리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불편하게 웃게 만들고, 잘못된 걸 알면서도 이해하게 만드는 그 감각이 오래 남습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너무 대중적인 영화를 기대하고 가는 것보다는 박찬욱 감독의 이전 작품들을 한두 편 보고 가시길 권합니다. 그래야 이 영화의 불편한 재미를 더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C%96%B4%EC%A9%94%EC%88%98%EA%B0%80%EC%97%86%EB%8B%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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