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만 달러짜리 저예산 하이틴 영화가 개봉 첫 주에만 1061만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저는 이 숫자를 보고 나서야 클루리스를 다시 꺼내 봤는데, 단순한 패션 영화가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 제대로 느꼈습니다.

1200만 달러로 만든 영화가 왜 지금도 회자될까
클루리스(Clueless)는 1995년 에이미 해커링 감독이 만든 하이틴 코미디입니다. 배경은 베벌리힐스의 고등학교, 주인공은 돈 많고 인기 많은 셰어 호로위츠입니다. 언뜻 보면 완전히 표면적인 이야기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영화를 보다 보면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이 영화의 출발점은 원작 각색입니다. 원작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엠마(Emma)입니다. 여기서 각색(Adaptation)이란 원작의 플롯과 인물 구도, 주제 의식을 다른 시대와 배경으로 옮겨 재해석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18세기 영국 시골 마을 이야기를 1990년대 캘리포니아 고등학교로 통째로 옮긴 것인데, 저는 이 선택이 단순한 상업적 계산이 아니라 꽤 날카로운 감각에서 나온 거라고 봅니다. 주인공의 자기중심적 시선, 타인을 바꾸려는 충동, 그리고 결국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구조가 시대를 불문하고 그대로 맞아떨어지거든요.
제가 직접 봤을 때 처음에는 노란 체크 의상과 화려한 학교 분위기에 먼저 눈이 갔습니다. 그런데 셰어가 타이를 변신시키는 과정에서 점점 "이건 셰어 본인 이야기이기도 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제목인 Clueless는 "눈치 없는"이라는 뜻인데, 이게 셰어를 설명하는 말인 동시에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입니다.
패션과 슬랭이 어떻게 시대 아이콘이 됐을까
클루리스가 단순한 흥행작을 넘어선 이유는 당시 10대 문화에 미친 영향력 때문입니다. 영화가 개봉하면서 그런지와 힙합 중심이던 청소년 패션 트렌드가 클린한 프레피 스타일(Preppy Style)로 급격하게 이동했습니다. 프레피 스타일이란 미국 동부 명문 사립학교 학생들이 즐겨 입던 단정하고 클래식한 패션을 말합니다. 셰어가 입고 나온 노란 체크 수트와 스커트가 그 상징이 됐고, 비슷한 스타일의 의상이 전국적으로 유행했습니다.
언어적 영향도 상당했습니다. 영화는 밸리걸(Valley Girl) 특유의 속어와 은어를 전국에 퍼뜨렸습니다. 밸리스피크(Valleyspeak)란 캘리포니아 상류층 10대 여성들이 쓰던 특유의 말투와 슬랭을 통칭하는 언어학적 용어입니다. 이 영화 이전까지 지역 방언 수준이었던 표현들이 클루리스 개봉 이후 미국 전역에서 쓰이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클루리스가 문화적으로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는 이후 오마주 사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기 아질리아는 2014년 히트곡 Fancy의 뮤직비디오에서 이 영화를 그대로 재현했고, 2023년 라쿠텐의 슈퍼볼 광고에는 앨리샤 실버스톤이 직접 출연해 자신의 아들과 함께 영화 장면을 패러디했습니다. 30년 가까이 지난 뒤에도 광고 소재로 쓰인다는 건, 이 영화가 단순한 추억 소환을 넘어서 하나의 문화 코드로 정착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런 지속성이 단순히 노스탤지어(Nostalgia) 때문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노스탤지어란 과거에 대한 감정적 그리움을 뜻하는데, 클루리스는 그것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지금도 "스타일이 선명한 영화"로서 자기 자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앨리샤 실버스톤과 폴 러드, 이 영화가 바꾼 커리어
이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캐스팅을 빠뜨릴 수가 없습니다. 셰어 역의 앨리샤 실버스톤은 클루리스로 하이틴 스타 반열에 올랐습니다. 셰어라는 캐릭터는 자칫 밉거나 피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인물인데, 솔직히 이건 제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실버스톤의 밝고 사랑스러운 에너지가 셰어를 미운 캐릭터가 아니라 귀여운 캐릭터로 만들어버립니다. 그 에너지가 없었다면 영화 자체가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조시 역의 폴 러드는 이 영화가 사실상 데뷔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이후 프렌즈(Friends) 출연을 거쳐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앤트맨(Ant-Man) 주연을 맡으며 전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클루리스를 보면 폴 러드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는데, 저도 처음 볼 때 "이 사람이 앤트맨이었어?"라는 반응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타이 역의 브리트니 머피는 이 영화가 데뷔작입니다. 조연이지만 영화 안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셰어의 성장을 이끄는 거울 같은 존재이기도 하고, 타이 스스로도 후반부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변해가면서 셰어의 자기중심적 세계관에 균열을 냅니다.
클루리스의 핵심 캐릭터 구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셰어 호로위츠: 자기중심적이지만 선의를 가진 주인공, 성장의 주체
- 타이: 셰어의 변신 프로젝트 대상이자 성장의 촉매제
- 조시: 셰어와 대립하다가 결국 가장 중요한 관계로 전환되는 인물
- 트래비스 버켄스탁: 겉보기와 달리 후반부 입체적 변화를 보여주는 캐릭터
트래비스의 경우, 최근 해외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스케이트보더에 대마초에 취해 사는 인물로 등장하지만, 나쁜 습관을 끊고 착실하게 변화하는 모습이 지금 기준으로는 오히려 더 입체적인 캐릭터로 보인다는 시각입니다(출처: Esquire).
90년대 하이틴 문법의 한계, 그래도 남는 것
클루리스를 다시 보면서 솔직히 불편하게 느껴진 부분도 있었습니다. 영화 전체가 외모와 인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누가 더 예쁜지, 누가 더 인기 있는지,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가 계속해서 판단 기준으로 작동합니다. 셰어가 타이를 변신시켜주는 행위 자체도 결국 자기 미적 기준을 타인에게 적용하는 것이거든요.
영화가 그 구조를 비틀거나 풍자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동시에 결국 그 구조 안에서 해피엔딩이 완성됩니다. 이 지점이 제 경험상 영화를 보고 나서 마음 한켠에 걸리는 부분이었습니다.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면에서도 한계가 느껴집니다.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가 갈등을 쌓고 해소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클루리스는 갈등이 생겨도 비교적 빠르게 전환되고, 감정을 오래 붙들고 가지 않습니다. 덕분에 보기에는 편하지만, 감정적으로 깊게 흔들리는 순간은 적습니다. 특히 후반부 로맨스는 전환이 워낙 빠르게 이루어져서 설득력이 다소 약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미국 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의 영구 보존 영화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미국 의회도서관의 영구 보존 영화란 문화적·역사적·심미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작품을 미래 세대를 위해 보존하는 제도로, 매년 25편 이내로만 선정됩니다(출처: 미국 의회도서관). 단순한 하이틴 코미디가 이 목록에 오른다는 건, 영화가 단순한 오락물을 넘어선 문화적 자산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제가 클루리스를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건 결국 이것입니다. "자신이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를 이렇게 유쾌하고 스타일리시하게 보여준 영화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요. 그 상태가 셰어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게 이 영화의 진짜 힘인 것 같습니다.
클루리스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분명 시대적 한계가 있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30년이 지나서도 광고에 오마주되고, 재평가 기사가 쓰이는 이유는 이 영화가 90년대의 특정 감각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담아냈기 때문일 겁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이라면 패션 영화라는 선입견 없이 꺼내보시길 권합니다. 아마 생각보다 훨씬 많은 걸 보게 될 겁니다.
참고: https://namu.wiki/w/%ED%81%B4%EB%A3%A8%EB%A6%AC%EC%8A%A4